<밝힐 수 없는 공동체>_2부. 연인들의 공동체 中 후반부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역, 문학과지성사, 2005.


“Ⅱ. 연인들의 공동체” 중 후반부 (71-90쪽)


책임의 강제는 자유와 존재 이전의 것이다(71).

  정념은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에 우리를 더 이끄는 타자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1)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목숨을 건 도약’의 경우, “오직 서로 사랑하는 자들[만]이 타인을 위한 죽음에 동의한다.” 또한 알케스티스2)의 예가 있다(72). 그녀에게는 불멸성 이외에 사랑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사랑에 영광을 돌리면서 동시에 죽음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삶을 끊임없이 타자를 위한 것이 되게 만들지만 아무 영광도 없는 초월성을 삶에 부여하기 위해서(73).

  영혼의 아프로디테도 육체의 아프로디테도 아닌, 가장 적게 언급된, 가장 두려운 아프로디테, 그렇기에 가장 사랑받은 세 번째 아프로디테가 있다(74). 연인들은 죽음의 산개(散開)와 마주하게 된다.3)불멸이란 독에 의해 / 여자의 정념이 완성된다.”(75)


● 연인들의 공동체, 이 낭만적인 제목은 물론 모순이다. 그러나(75).

  전통적인 공동체선택적 공동체를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는 결정의 자유와 상관없이 땅․피․인종에 대한 찬양의 근거가 된다. 반면 두 번째는 연인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찾는 존재들의 경련적인 움직임”(바타유)이 출현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들을 일반 사회로부터 끄집어내 육체와 마음과 생각으로 (둘씩 또는 나아가 집단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도록 끌어당기는 어떤 움직임이다(76).


●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붕괴시키는 데에 있다. 그곳에 우주 무화(無化)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재난의 가능성이 있다(78). 뒤라스는 정념의 진부한 유희에 몰두한 사드를 재현한다. 즉 그녀는 무감각, 무감정, 무기력이 연인들에게 가져온 하나의 결과를 보여준다(79).

  두 인간 존재들은 오직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어떤 점에서는 찬양하기 위해) 결합되기를 시도한다.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항상 이루어지는 이 결합에서의 착각(79). 그럼에도 불구 그들은 공허의 내밀성을 거쳐 어떤 공동체를 형성한다. “연결되어 있기를 받아들이는 결국 단 하나의 삶, 즉 표현 불가능한 삶.”(르네 샤르)(80)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텍스트에서 그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 안에 있는 어머니를 다시 근친상간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 정당화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이런 또는 저런 여자로 특징짓게 할 모든 특수성을 넘어서서 절대적 여성성에 이르렀다(81).

  “무엇을 위해 노력하죠?” “당신은 말한다. 사랑하기 위해.” 그의 대답은 순진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4) 또한 감동적이다. 순진함 속에서 그는 사랑을 알고 있다고 믿는 자들보다 아마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이 두 존재 사이의 공동체는 가장 놀랍지만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공동체다(83).

  그녀는 그의 반(反)베아트리체다. 명백한 무감각에 따르는 관계만이 있을 뿐이나, 무감각으로 인해 뭐라 말할 수 없는 쾌락으로 나아간다(84).

  ‘그 자신의 방’에 그녀가 있지만, 그것은 마치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연인들의] 공동체가 와해될 때, 공동체는 설사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인상을 가져다준다(85).


● 공동의 것이 될 수 없는 낯선 것이 영원히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언제나 이미 떠나 있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를 세운다(86).

  그는 그녀에게 세계에 대해 말해주고,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자는 데 리듬을 부여하는 새벽 여명에 대해 말해준다(86).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나에게 물어보세요. 나로서는 할 수 없어요.”(87)

  우리는 그를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간직하기를 항상 원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적’ 오류를 범해서라도 간직하기를 원하는 사랑하지 않을 자유. 그는 자신이—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한 명의 여자도 사랑하거나 욕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결국 스스로 알기에 이른다. 그러나 반대의 사실이 입증된다(87). 그는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를 마음대로 다”루는 대신, “그 육체가 행복이 가져다주는 위험을 감수할 때 드러내는 부드러움과 똑같은 부드러움으로 그 육체를 애무한다.”(88)

  그 여성적인 것은 괴테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테의 지상적이고도 천상적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진부한 모방이 아니다. 이후 그는 “그녀를 취한다. 그것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자기 시작한다.” “그녀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88)

  그녀의 사라짐은 오기도 전에 잃어버린 사랑의 추억을 그에게 남긴다. 그는 성스러운 현전이 그를 떠나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 현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89).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는 너무나 유명하고 지나치게 되풀이되어온 경구를 남겼다(89).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침묵하기 위해 [침묵의] 말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그 물음에 우리를 구속하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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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nara | 2009/02/28 04:28 | 에티카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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