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 (박준상)

박준상, 『바깥에서―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인간사랑, 2006.


2. 공동체 없는 공동체 (69-120쪽)


● 바깥에서 ‘나’(l'un)와 타자는 비참하지만 찬란한 유한성(예를 들어 죽음)에 대한 공동의 증인으로 남는다. 찬란한 유한성, 왜냐하면 유한성을 통해서만 인간은 급진적 소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70).

  바깥은 어떤 매개물이 아니라 공동존재의 조건이다.(바깥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급진적이며 진정한 관계는 설사 어떤 매개물과 관련이 없지 않더라도 그것을 초월한다. 만일 어떤 매개물을 통한 결합이 관계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을 때 관계는 필연적으로 왜곡된다.)(71)

  “어떤 공동체도 이루고 있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또는 “공동체 없는 공동체”, “부정(不定)의 공동체”, “무위(無爲)의 공동체”(낭시)는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동사적 사건(관계맺음, 관계의 열림의 사건)을 가리킨다(72).


● 블랑쇼의 ‘정치적인 것’이 문학작품을 매개로 한 소통(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소통)에 있어서 여전히 강조된다(73).


1. 분리 가운데서의 타자와 나


● 블랑쇼의 사유는 끊임없이 레비나스의 사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74).


●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불규칙하고 지속되지 않는 시간성에 따르고 있다(75).

  타자는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모든 힘의 행사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조형적 이미지를 넘어서면서 어떤 형상과도 일치하지 않는 타자의 현전(présence de l'Autre)의 권위에 의해 가능하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 de l'Autre) 자체를 구성한다(75-76).

  블랑쇼는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들이 처했던 상황을 예로 든다. 왜 나치는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 내몰린 자에 불과한 그의 제물 앞에서 냉정하게 그것을 다룰 수 없는 것일까? 여기에 타자의 현전이 반유태주의라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순간이 있다(76). 나치의 지배에 한계가 주어지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고문당하는 자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타자의 현전은 나와 타자를 최후의 차이 속에 남겨 둔다(76-77).

  나와 타자는 돌이킬 수 없이 분리(séparation)되어 있다. 허나 이때 분리는 분리 가운데에서의 소통의 주의를 요구한다(78).


2. 책임성으로부터의 소통


● 타자는 이미 가까움(proximité), 비무관심성(non-indifférence)에 의해 관계 가운데 놓여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책임성(responsabilité)이라는 말로 정의한다(79).

  레비나스는 어떤 주체성을 옹호한다. 주체성, 다시 말해 “타자를 위한 나의 대속(substitution), […] 자아(Moi)의 폐위(廢位)로서의 자신(soi)의 설정, 단일성으로서의 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그 이하의 것,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무관심성으로서의 차이”, 그것은 책임성에 기입된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성은 그것이 책임성인 한에서 주체성이다(80).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상호성(réciprocité)을 배제한 채 타인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80). 나와 타자의 관계는 양자의 불평등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비대칭성(asymétrie)’이라 부른다. 타자의 현전 앞에서 나는 다만 그것에 응답해야 할, 타자를 환대해야 할 위치에 있을 뿐이다(81-82).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는 자아(moi) 너머의 주체(sujet)이다. 나는 나의 한계 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책임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무한의 이념에 정초된다(82).


3. 타자의 현전: 레비나스와의 대화


● [자아의 경우 즐김과 욕구 사이의 순환과 왕복] 레비나스에게 자아(le moi)는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즐김(jouissance)을 위해 활동한다. 즐김이 자아의 사물들과의 원초적인 관계를 구성한다(나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살기 위해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다). 즐김은 욕구(besoin)에 의해 배가된다(83).

  [거주하는 자아] 즐김의 형식은 언제나 ‘…을 즐김(jouir de…)’, 또는 ‘…으로 살아감(vivre de…)’이다. 자아는 어떤 장소[‘세계(monde)’]에 ‘거주(le chez soi)’하려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에의 요구와 함께 발생한다(84). 여기에 에고이즘이 있다. “…에 의존된 삶 또는 즐김.”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자아의 거주는 내가 타자를 환대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85).

  자아는 이미 세계에 놓여 있다. 바깥에서 “‘내’가 ‘그 자신’[비인칭]을 알아보지 못한다(86).”


● 그런데 블랑쇼는 즐김으로 즉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86) — 극단적 고통의 욕구, “헐벗은 삶과의 적나라한 관계”, “즉각적으로 살려는 욕구.” 블랑쇼는 이를 “메마른 욕구” 또는 “즐김이 배제된 욕구”라고 표현한다. 이는 삶에 대한 욕구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닌 욕구, 삶에 대한 비인칭의, 익명의 적나라한 욕구이다(87-88). 즐김이 배제된 욕구는 또 욕구와 반대로 바깥에서, 모든 세계의 타자에서 발생된다(89).

  [욕구의 익명성] 바깥에서는, 자아와 그 자신의 관계가 세계의 부재로 인해—거주의 불가능성으로 인해—좌절된다. 다시 말해 바깥에서 욕구의 비인칭성에 묶여 자아는 비인칭의 인간 또는 익명의 인간으로 전환된다(자아의 타자화의 사건). 거기서 나는 어느 누구(quelqu'un)로 대치된다. 살아감(vivre) 또는 생존함(survivre)은 ‘…으로 살아감’과 차이가 있다. 살아감은 ‘그저 살아감’이거나 ‘아무 것으로나 살아감’일 것이다(89).

  즐김이 배제된 욕구는 ‘누구를 위함인지 모를 에고이즘’, 또는 “에고 없는 에고이즘”(블랑쇼)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생존에, 비천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그 언제나 삶에 집착한다. 즐김이 배제된 욕구는 중성적인 욕구, 우리들 모두의 욕구로 드러난다(90).

  내 안에 누군가의 현전이 그려진다. 그 현전은 나에게 무한의 현전으로 제시된다(91). 그 현전은 세계로부터의 추방, 바깥으로의 망명이라는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블랑쇼는 이 멀어짐을 세계의 중성화라 부를 것이다(93).


4. 타자를 위한 ‘나’


●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그가 ‘얼굴(visage)’이라 부르는 현전이다. 이는 비대칭성에 근거한다(얼굴을 통해 타인은 마치 과부나 고아처럼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한 자로 나타난다)(94). 레비나스에 대한 블랑쇼의 반성은 여기서 시작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비대칭성(asymétrie)을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95).


●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타자에 대한 책임성에 부합되는 나의 주체성에 그 모든 무게가 걸리는 과도한 윤리가 아닐까.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어떤 대자를 향한 은밀한 열망, 어떤 자기의식의 우위에 대한 확인, 일종의 나르시시즘 또는 유아론(唯我論), 어떤 대자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95-96).

  레비나스의 주체성의 주체는 “피와 살을 가진” 주체, “배고프고 음식을 취하는, 피부 안에 내장을 가진, 입 안의 빵을 줄 수도,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인간”이다. 그 주체성은 ‘전-근원적으로(pré-originellememt)’ 알려지며, 레비나스가 ‘감수성(sensibilité)’이라 부르는 타자에로의 수동적 이끌림이다(98).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영혼의 현상(psychisme de l'âme)”으로 귀착된다. 영혼의 현상은 타자의 현전에 따라 내가 감당하는 나의 단일성(unicité)이다. 영혼의 현상은 자신의 ‘포기(abdication)’와 혼동될 수 없다. 그 너머이며, 자기 ‘희생(abnégation)’이다(99-100).


●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유아론과 정반대되는 철학”, 그러나 “분리[가운데에서의 소통]를 말하는 철학”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고립된 자아의 존재가 아닌, 어떤 공동존재를 전제로 한다(100). 나로 하여금 타인을 환대케 하는 주체성,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 이미 들어가 있을 때만 유지되는 주체성이다(101).


● 레비나스의 윤리는 의식의 모든 작용이 유예된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과격하다(101). 그러나 하나의 윤리정치적 담론의 기초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102).


5. ‘우리’를 위하여


●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일방적인 비대칭성(윤리적 관점에서 나에 대한 타자의 우위)은 항상 유지될 수 있는가?(103) 우리는 비대칭성을 감당할 수 있다. 인간은 타자가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 다만 자신의 자아라는 위치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자신이 의식 그 이하에서 타자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파괴될 수 없는 휴머니티를 견지하고, 인간 자신의 부수어지기 쉬움 속, 하지만 파괴될 수 없는 현전을 표현하려 한다(104).

  그럼에도 불구 블랑쇼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일방적 대칭성(타자의 나에 대한 윤리적 차원에서의 일방적 우위)이 급진적인 소통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일 수 있는가를 의심한다(105).

  레비나스에게서와는 반대로 블랑쇼에게서 타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타자의 현전을 부르는 자는 관계의 한 축인 타인만이 아니다. 관계를 이루는 축은 ‘나’와 타자, 로 시간성에 따라 이 타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106).


● 레비나스의 주체성에서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정된 위치에, 타자를 위한 ‘볼모’의 위치에 묶인다. 그런데 타자가 나를 그의 파괴적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나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 없다. 타자는 나에게 잔인한 주인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107). 그러나 나를 박해하는 잔인한 이기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여전히 그를 감당해야 한다면, 이는 내 안에 그려지는 타자의 현전을 보존하기 위해서다(108).


● 나는 타자에게 변증법적이자 비변증법적인 항의(contestation)로 단호히 저항해야만 한다.

  지배자로서의 타인에 대한 나의 항의(109)는, 타인과 내가 인간류에 속한다는 궁극적 공동체의 감정이 갖는 비변증법적[비-상호적]인 요소로 인해 가까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111). 반대로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은 주인의 위치에 올라 자율적 자아로 인정받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투쟁까지 감수하려는, 상호의존적 관계에까지만 머무른다(111). 이 경우 나는 지배주의적 자아(Moi)는 아니고, 다만 세계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자아(moi)일 것이다. “졸이 모든 종류의 말이 될 수는 있지만 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변증법-비변증법적 항의는 “공동-내의-존재(être-en-commun)”에 대한, 의식 너머의, 의식을 가로질러 가는 열망, 정념(passion)이어야 한다(112-113).


● 변증법-비변증법적 항의를 블랑쇼는 ‘거부(refus)’로 표현한다. 거부는 힘 있는 말인 동시에 또한 무력한 말이다. 다만 중얼거리기(murmurer)만 하는 어느 누구인가의 말(parole de quelqu'un)이다. 따라서 거부는 어떤 법의 비호 아래 아직 모일 수 없는 자들의 말, 공통의 독트린, 조직, 기관을 갖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결코 눈에 띄지 않는 말이다(113-114).


● 블랑쇼에게 [레비나스의] 주체의 문제나 주체의 주체성의 문제는, 우리의 관계나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보다 덜 중요해 보인다(114).


6. 공동체 없는 공동체


● 블랑쇼에게 실존의 근본적 조건은 레비나스의 나에 대한 타인의 윤리적 우위, 즉 비대칭성으로 정의되지 않는다(116). 블랑쇼는 대신 나와 타인의, 인간들의 관계의 조건을 ‘이중의 반대칭성(double dissymétrie)’이라고 부른다.

  타인이 나에 대해 타자인 것처럼 나 역시 타인에 대해 타자이다. 결국 이중의 반대칭성(나에 대한 타인의 비상호성(irréciprocité)(118)은 (일방적) 비대칭성보다 나와 타인의 관계의 실존적 조건을 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117). 비대칭성의 윤리성이 무시될 수 없는 가치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항상 이중의 반대칭성이라는 실존적 조건에 따라 이해되어져야만 한다(118).


● 나와 타인은 함께 타자의 현전을 향해 나아가되, 타자의 현전이 누구[‘나’ 혹은 타인]에게서 발생하든지, 그 단수성(singularité)을 나누어 갖기 위해 나아간다. 나와 타인은 제3의 인물이라는 공동의 지위에 속한다. 이 비인칭적, 익명적 탈존을 블랑쇼는 “그(le ll)” 또는 “그 누구(le On)”라고 부른다. ‘그’는 그 모두의 타자,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Autre)를 제시한다(119). 그것은 상호적이 아닌 평등, 무정부주의적·종말론적 평등, 블랑쇼가 ‘우정(amitié)’이라고 부르는 평등일 것이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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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nara | 2009/02/25 01:44 | 에티카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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