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콜린 윌슨) 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이성규 역, 범우사, 1997.


제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18세기 및 19세기의 합리주의 시기처럼 철학자들이 공개 말타기 대회의 카우보이같이 행세하고 있는 세기에 태어난 아웃사이더는 (까뮈나 사르트르와 같이) 허무적인 페시미스트일 수는 없다(86).


플라톤적 이상가이며 꿈을 꾸는 사나이라 자칭하는 아웃사이더에게 부르주아들은 기꺼이 그의 존재의 권리를 인정해준다. 이리하여 아웃사이더는 사회질서 안에서 비실제적인 몽상가로서 자기 위치를 차지한다. 비실제적 몽상가의 경향은 젊은 베르테르가 등장하여 심정상의 혁명을 일으킨 사건에서 비롯된다(87).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는 ‘별세계를 꿈꾸는 자’이며, 본질적으로 몽상가이며 공허한 날을 노래하는 한량이다. 그는 자기의 환경이 자기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데 주로 관심을 둔다(88-89).


[사르트르와 같은] 리얼리스트적 아웃사이더는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는 “어디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90). <구토>의 사르트르는 잠시라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조이스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91).


이 장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루는데, 영어 상용국에서 헤세 업적의 위대함이 거의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작품은 빌둥스로만, 즉 교양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92).


근대에 최초로 나타난 아웃사이더적 우화인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서 ‘행복의 골짜기’라 불리는 유토피아 사회에 사는 왕자가 권태와 초조감에 시달려 바깥세계로 나간다. 그가 얻은 결론은 “나는 행복하게 되고 싶지 않다. 생생하고 활동적이길 바란다”이다(93-94).


<수레바퀴 아래서> 이후 3년간 헤세의 세계관에 대변화가 일어난다. <데미안>과 이후 네 편의 작품들을 분석한다.(94)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암흑세계에 내려가는 것은 반드시 악은 아니며 지성과 대담성의 필연적인 표현일지 모른다. 거리의 왈패 크로머의 지배에서 해방된 싱클레어는 그러나 이전의 질서 관념으로 되돌아간다. 그렇지만 이는 혼돈에서 고개를 돌린 것에 불과하다. 혼돈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97-98).


<싯다르타>에서 냇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싯다르타는 냇가에서 명상에 잠긴다. 헤세가 도달한 결론은, 궁극적으로 성공도 실패도 없으며 인생은 냇물과 같은 것이어서 흐름이 그치지 않는 데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망을 느끼며 이 소설을 접어둘 수밖에 없다(101).


<황야의 이리>는 이제까지 나온 아웃사이더 연구서 가운데 가장 예리하고도 철저한 것 가운데 하나다. 어느 중년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자체가 매우 중요한 진보다(102). 주인공 할러는 자기분열의 인간이다(104). 문명과 야만은 항상 서로 적대하며 살고 있지만, 양자가 화해할 때가 있다(105).


가령 고민 때문에 부르주아보다 생존에 부적당한 인간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그의 열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고민이 잘] 화합[?]된다면 그것은 아웃사이더의 우월을 확증하는 ‘보다 충실한 인생’을 나타낸다. 아웃사이더가 자기 힘을 자각할 때 그는 통일되고 행복해진다(105). 아웃사이더들 역시 사회에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부르주아 세계가 그 자신의 침체한 무게에 억눌려 허덕이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그들의 분투 덕분이다. 그들이야말로 사회의 정신적 추진력이다(105-106).


<황야의 이리>에는 무수히 상반된 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가 존재한다.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무조건의 의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르주아 문명은 개성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106).


이 작품의 신조는 “필사적으로 자아에 매달리고 필사적으로 인생에 매달리는 것”이다(107). “자기의 세계를 좁히고 자기의 영혼을 단순화하는 대신,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최후엔 전 세계를 자기 영혼 속에 포괄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구제의 길’은 이상 명백히 제시됐다(108).


<싯다르타>에서의 체험, “죽음에 이르는 좁다란 길이 어찌 되든[…]하찮은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별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은 낭만주의의 궁극적으로 근거 있는 핵심으로, 일종의 종교적 긍정이다(110).


<황야의 이리>에서 할러는 말하지 못했던 긍정의 말을 하기에 이른다. “나는 그러한 고초를 다시 한 번 맛보고 그 무의미한 것에 다시 한 번 공포를 느끼고 싶다. 다시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내 안에 있는 지옥을 다시 거닐고 싶다. 어느 때고 이 놀음에 훨씬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111).” 헤세의 관념소설에는 도스또옙스끼에만 비교될 수 있는 활력이 넘쳐 있다(112).


<지와 사랑>은 금욕주의 대 세속주의의 문제에 대한 연구서다(112). 젊은 수도사 나르치스를 떠나 골드문트가 ‘자기를 찾아서’ 수도원에서 세계로 떠난다. 방랑의 클라이맥스는 그가 버려진 교회의 벽화를 보는 장면이다. 골드문트는 생의 한가운데서 인간이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돌아온 골드문트가 죽은 뒤 남긴 조각은 무명의 거장으로서 그의 인생에 결여됐던 영원성에 도달한 것이다. 죽은 골드문트 대신 역설적으로 나르치스가 대신 그것을 깨닫는다(113-114).


낭만주의 특유의 위대한 넋두리에서 완전히 탈피한 《유리알 유희》는 미래의 어떤 시기, 즉 귀족적인 인텔리겐차 계급인 카스탈리안 계급이 국가에 의해 유지 보장되는 시기로 설정돼있다. 이 계급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적 이상이 도달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 제도로부터 지적인 태만, 거만함 그리고 자존에 빠져들 우려를 감지한 요제프 크네히트는 퇴직하여 ‘속세’로 뛰어든다. 그는 한 소년이 아침에 태양을 예배하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는 그 자신의 인생에 결여된 것이다. 이 최후의 작품에서도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양자 중 하나를 택하지 못하고 있다(114-115).


헤세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한 소설가이며, 인생을 되는대로 사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진 아웃사이더다(116). 그는 인간이 미지근한 일상 범사의 차원에 생존하는 대에 깊은 불만을 품으며, 예술가가 창조시에 느끼는 법열의 강렬함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길이 있어야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낭만적인 낙관론이라 일소에 부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아웃사이더 공통의 이상이 하나로 주목할 만한 점이다(117).


2장의 [실존적] 아웃사이더들은 인생이 비현실성이 고통을 주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절히 느낀다. 그러나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117-118). 그런데 별안간 스크린 위 환각은 사라지고, 거기서 전개된 사건의 인과적 연관이 단절되어 그들은 가공할 만한 자유에 직면한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자면 ‘자유의 선고’를 받는다. 마침내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스크린의 세계가 환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관의 세계 또한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고약한 가능성이 생기고 만다(118).


자기실현의 문제, 즉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미해결로 남는다(121).


outsider.hwp

by cynara | 2009/02/18 03:55 | 에티카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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